
가브리엘의 기적은 누군가의 변화가 크게 울리는 말 한마디가 아니라, 한 발짝 옆에서 묵묵히 함께 걸어주는 그저 ‘존재’ 자체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 가족,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극적인 고조 없이 담담하고도 절제된 톤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한 아이의 침묵 속에 숨어 있는 세상을 만나고, 그 아이 곁을 지키는 어른의 믿음이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가는지를 보게 된다. 감동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영화는 깊은 울림을 준다. 그 울림은 우리가 잊고 있던 가장 인간적인 감정, 바로 ‘같이 있어주는 것’의 힘에서 비롯된다.포기 – 더 이상 손 닿지 않는 거리가브리엘은 태어날 때부터 의사소통이 어려운 아이였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 눈을 ..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 2023)는 단순히 “옛사랑의 재회”를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시간이 흐르며 잊혔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순간, 그 안에 남아 있던 수많은 감정들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되살아나는 과정을 그린다. 감독 셀린 송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의 결은 섬세하고 깊다. 마치 어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전하는 순간처럼. 이 영화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본, 혹은 상상해 본 이야기다. 어쩌면 다시는 마주칠 수 없을 것 같던 사람, 다시 마주친 순간에도 과거의 감정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서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그 어색함.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사이, 그 여백을 아주 조용하게 채워나간다.인연 – 어린 시절, 이름을 부르던 시간나와 당신 사이, 우..

떼아뜨르 캄캄(Theatre Camp, 2023/2024 국내 개봉)은 예술과 교육, 그리고 아이들의 감정이 어우러진 아주 따뜻하고도 유쾌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연극 캠프에서 벌어지는 즉흥극과 공연 준비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 미국의 연극 교육 현장을 모티브로 한 만큼 현실감이 뛰어나고, 연출과 대사에는 웃음과 진심이 동시에 묻어난다.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과 그 무대 위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과 믿음은 관객에게 오래도록 따뜻한 잔상을 남긴다.창작 – 무대 위에서 피어나는 진짜 감정떼아뜨르 캄캄의 중심에는 ‘창작’이 있다. 하지만 이 창작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를..

퍼스트 카우(First Cow, 2024 국내 재개봉)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의 속도에서 벗어난 영화다. 이야기의 전개는 느리고, 인물들은 조용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조차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이 있고, 함께 버텨낸 시간들이 고스란히 스며든다. 미국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단순한 시대극도, 범죄 서사도 아니다. 그보다는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존재의 증거’가 되어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조용하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말이 아니라 ‘정적’으로 감정을 말하고, 행동보다는 ‘관계’로 서사를 만들어간다. 퍼스트 카우는 그렇게 아주 천천히, 하지만 오래도록 남는 이야기를 만든다.고요 – 아무 말 없이 이어지는 신뢰영화는 19세기 미..

《더 홀드오버스》(The Holdovers, 2023/2024 국내 개봉)는 겨울 방학 동안 학교에 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에 속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철없지만 외로운 학생, 상실을 견디는 조용한 급식실 관리자, 그리고 인생이 꼬여버린 채 냉소로 자신을 감추는 교사. 이 영화는 바로 그 ‘남겨진 사람들’의 겨울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힘은 그 겨울이 끝날 때쯤, 관계와 감정이 천천히 녹아드는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데 있다. 폴 지아마티의 깊이 있는 연기와 알렉산더 페인 감독 특유의 절제된 연출은 잔잔하지만 오래가는 여운을 남긴다.겨울 – 멈춰버린 시간 속 관계겨울은 이 영화의 정서를 규정짓는 핵심 배경이다. 학교라는 공간은 차갑고, 창밖의 풍경은 눈으로 덮여..

《에밀리》(Emily, 2023/2024 국내 개봉)는 단지 한 여성 작가의 전기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말하지 못한 감정과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이 어떻게 기록으로 남게 되는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폭풍의 언덕’을 쓴 작가, 에밀리 브론테. 그녀의 삶은 거의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이 영화는 그 침묵의 시간을 조용히 파고든다. 에밀리는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글에는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 영화는 그러한 삶과 문장의 뒤편에 있었던 고독, 열망, 그리고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게 만든다.줄거리 – 폭풍이 오기 전의 그녀에밀리 브론테는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의 거친 자연 속에서 자랐다. 그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고, 문학의 중심지였던 런던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