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origin="anonymous">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 crossorigin="anonymous">-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나의 소녀시대 - 멈춰버린 순간, 말하지 못한 감정, 다시 피어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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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별 인생영화 큐레이션

나의 소녀시대 - 멈춰버린 순간, 말하지 못한 감정, 다시 피어난 기억

by flavorflux 2025. 5. 12.

《남매의 여름밤》(2020, 윤단비 감독)은 조용하고, 천천히 흘러가는 영화다. 배경은 여름방학 동안 아이들이 머무는 외할아버지 집이다. 이곳은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공간이다. 영화는 그 낯선 친근함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보여준다. 주인공 옥주는 언뜻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지만, 그 눈빛과 행동에는 무엇인가 눌러 담긴 감정이 있다. 동생 동주와 함께 있지만, 오히려 더욱 외로워 보이는 모습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의 거리감을 상징한다.

영화는 많은 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이 말을 멈추는 순간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전해지는 감정, 같이 있는 듯하지만 서로 닿지 않는 마음. 《남매의 여름밤》은 그런 감정들로 가득 차 있다. 관객은 옥주의 시선을 따라 집 안을 서성이고, 아버지의 무거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이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침묵의 밀도는 짙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선명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각자 다른 온도로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이토록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은 흔치 않다.

특별한 사건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관객은 각자의 기억을 되짚게 된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여름방학, 익숙한 친척집, 이해되지 않았던 어른들, 동생과의 미묘한 거리감. 영화는 그 평범한 장면들을 섬세하게 펼쳐 보이며, 말보다 감정이 먼저 전해지는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다가서지 못한 마음

옥주는 외할아버지와 한 지붕 아래에 있지만, 둘 사이엔 일정한 간격이 있다. 외할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다. 옥주는 그런 외할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방법을 모른다. 저녁을 먹을 때도, 방에 같이 앉아 있을 때도,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눈빛이나 자세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옥주는 외할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고, 외할아버지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옥주의 시선은 늘 관찰에 가깝다. 어른들의 대화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대화가 벽 너머에서 들릴 때,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좋지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녀는 어린아이지만, 감정에는 민감하다. 다가서고 싶지만 거리를 두는 그녀의 태도는 외할아버지와의 관계뿐 아니라 아버지, 동생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그 거리감은 단순히 성격 때문이 아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남매의 여름밤》은 바로 그 감정을 아주 정확하게 포착한다. 아이는 다 알지 못하지만, 다 느낀다. 옥주는 외할아버지의 말투나 식사하는 모습, 할머니의 사진이 놓인 자리를 바라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품는다. 그것은 외로움일 수도, 서운함일 수도, 막연한 슬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책상 위, 오래된 여름이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 출처: Pixabay@Sanjiang

흘러가는 계절

이 영화에서 여름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정서다. 뜨겁고 축축한 공기, 낮잠과 선풍기 바람, 달빛에 젖은 마당, 풀벌레 소리. 여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머무는 감정은 오히려 멈춰 있는 듯하다. 옥주는 그런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다. 친구들과 노는 장면도 있고, 동생과 다투는 장면도 있지만, 그녀는 늘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그 안을 떠다닌다.

옥주가 걷는 골목,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멀리서 바라보는 가족의 뒷모습. 그 모든 장면에 시간이 쌓여 있다. 그녀가 여름을 살아가는 방식은 무언가를 쫓기보다는 받아들이는 데 가깝다.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우고, 외할아버지와 가까워지지 못하며, 동생과도 자주 부딪히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안에 담는다. 그것이 그녀의 성장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성장을 사건이 아닌 시간의 축적으로 보여준다. 계절은 흘러가고,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고, 감정은 쌓인다. 어느 순간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루하루를 겪으며 조금씩 나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 과정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관객은 옥주의 하루를 따라가며 자신이 지나온 여름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여름은 지나가지만, 그 여름의 감정은 오랫동안 남는다.

남겨진 온기

옥주와 동주는 남매지만, 항상 함께 다니지는 않는다. 동생은 장난스럽고 활발하며, 옥주는 조용하고 사려 깊다. 둘은 자주 어긋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어긋남 속에서도 묵묵히 존재하는 정을 보여준다. 밤이 되면 같은 방에 누워 자고,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안정을 느낀다. 싸우고도 몇 분 뒤에 다시 웃게 되는 아이들의 관계처럼, 둘 사이엔 말보다 먼저 감정이 움직인다.

외할아버지와의 관계도 변화한다. 처음엔 다가가지 못했던 옥주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마음을 연다. 외할아버지도 딱딱한 말투는 그대로지만, 점점 더 자주 옥주를 바라본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소소한 행동들 속에 따뜻함이 있다. 함께 TV를 보고, 밥을 먹고, 라디오를 듣는 일상. 그 속에 사랑이라는 말이 숨어 있다.

할머니의 부재는 영화 내내 공간을 채운다. 사진으로, 대화 속 단편으로, 혹은 침묵으로 존재하는 인물이다. 가족은 할머니가 없는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기억하고, 그 감정은 말로 표현되기보다는 표정이나 행동으로 전해진다. 그런 장면들이 쌓여서 영화는 ‘남겨진 온기’라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온기는 겉으로는 식어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따뜻하게 남아 있는 감정이다.

“같은 길을 달렸지만, 같은 마음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 출처: Pixabay@ClickerHappy

《남매의 여름밤》은 조용한 영화다. 인물들은 크게 웃지 않고, 울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조용함 안에는 많은 감정이 숨어 있다.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마음, 이해하지 못한 말들, 오래전에 지나간 계절이 남긴 흔적들. 영화는 그 모든 것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려낸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남는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신이 어릴 적 겪었던 어떤 여름이 떠오를 것이다. 조용하고, 어설프고, 따뜻했던 그 여름의 감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