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크린이라는 낭만과 환상의 세계 뒤편에 어떤 현실이 존재하는지 한 번쯤은 상상해 봤을 것입니다. 『바빌론』은 그 상상 너머, 화려함의 절정이었던 192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영화 산업이라는 집단 환상이 만들어내는 찬란함과 비극, 성공과 몰락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펼쳐 보입니다.
3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화면은 숨 막힐 듯 화려하고 정신없지만 그 속에서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감정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때로는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꿈을 좇던 이들의 광기, 정점에 오른 자들의 허무,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잊히는 수많은 이름들. 『바빌론』은 이 모든 것을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던지고 있습니다.
🎬 작품 소개 - 황홀과 혼돈이 공존하는 감독의 야망
『바빌론(Babylon)』은 『라라랜드』와 『위플래시』로 이미 음악과 예술에 대한 열정, 집착, 그리고 고독을 풀어낸 감독의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아노와 재즈가 아닌, 할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에서 벌어진 진짜 꿈과 환멸의 서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1920년대 말, 무성 영화가 유성 영화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기. 영화는 진화를 거듭했고, 그만큼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욕망도 격렬해졌습니다. 『바빌론』은 그 치열한 시대 속에서 영화에 모든 걸 건 이들의 삶을 통해 예술이라는 세계의 찬란한 시작과 그 뒤편의 어둠을 함께 보여줍니다.
감독은 초기 할리우드가 가진 환상적인 이미지에 극단적인 광기와 파괴의 에너지를 섞어, 현란한 시각 연출과 과감한 전개를 통해 관객이 영화라는 미디어의 '근원적인 욕망'과 '파괴력'을 동시에 경험하게 만듭니다.
🎞 줄거리와 등장인물 - 스타를 꿈꾸고, 결국 추락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세 인물의 시선을 따라 전개됩니다. 이들의 삶은 엇갈리면서도, 결국 모두 같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누군가는 빛을 향해 달려가고, 누군가는 무너지는 순간에도 환상을 붙잡고자 합니다.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는 멕시코계 이민자입니다.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가득 찬 그는, 처음에는 파티 현장을 정리하는 하인에 불과했지만 열정과 집요함으로 점차 영화계 내부로 들어서게 됩니다. 카메라 뒤편에서부터 제작까지, 그는 점점 스스로의 위치를 확장해 나가며 그토록 바라던 '영화 속 인물'이 아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진 신예 배우입니다. 무성 영화 시대에 그녀는 본능적인 연기력과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스타가 되지만, 유성 영화로의 전환은 그녀에게 위기이자 변화를 강요합니다. 넬리는 끝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티려 하지만, 그 선택이 그녀에게 남기는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는 시대를 풍미한 무성 영화배우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유성 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의 매력과 기술은 더 이상 대중에게 통하지 않게 되고, 그는 서서히 잊히는 존재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는 술과 파티, 허무함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자부심과 시대의 변화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흔들립니다.
이 세 인물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절정과 추락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마치 지금의 우리에게도 "당신은 무엇을 좇고 있는가"라고 묻는 듯합니다.
💭 관람 후 느낀 감정들 - 기억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바빌론』은 과잉의 미학, 혼란과 광기, 그리고 아름다움의 극단 속에서 하나의 명확한 감정을 관객에게 남깁니다. 바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이 남긴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기억을 가장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도구이자,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는 유일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영화 후반, 매니가 조용히 극장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스크린이라는 매체가 가진 감정의 힘을 가장 진하고 애틋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넬리와 잭, 그리고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로소 '영화'라는 것이 무엇을 남기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바빌론』은 꿈을 향한 집착, 그 안에서 생긴 상처와 찬란함, 그리고 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영화가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느낄 수도, 너무 과감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감정은 결국 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화라는 세계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빼앗겨본 적이 있다면, 『바빌론』은 당신 안의 그 기억을 다시 꺼내줄 것입니다. 그리고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 나는 이걸 사랑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