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은 단순히 ‘남자가 여자 행세를 하며 취업을 시도한다’는 코믹 설정만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 중심엔 누군가의 아빠이자, 한때는 하늘을 날던 사람이자, 삶의 정체성과 마주한 평범한 한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진짜 나로 다시 날기 위한" 여정이 담겨 있다.
영화는 좌절과 실수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삶의 조종간을 붙잡으려 애쓰는 사람에게 유쾌하지만 절절한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도 아직 비행 중이에요. 그러니 착륙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조용히 속삭인다.
착륙 없는 하루들
한정우(조정석)는 한때 잘 나가던 민항기 조종사였다. 흔들림 없는 제복, 안경 너머의 당당한 눈빛,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순간의 전율. 그 모든 건 이제 추억이 되었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고와 억울한 해고로 그의 인생은 기수를 틀듯 급전직하한다. 제복을 벗은 정우는 비행이 아닌 생존을 위해 매일 땅만 보며 살아간다.
가정은 빠르게 흔들리고 초등학생 딸은 무심한 듯 정우를 바라보고 있고 아내와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면서 정우는 ‘이 집의 가장’이라는 자리에 점점 어색해진다.
아무리 애써도 이전의 자신처럼 돌아갈 수 없어서 어제까지 ‘파일럿’이었던 그는, 이젠 콜센터, 택배, 편의점 야간 알바 속을 전전하게 된다.
정우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또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그 모순된 감정 속에서, 그는 매일 조금씩 고개를 숙여간다.
비행 중인 사람만이 아니라 잠시 멈춘 사람의 시간도 결코 헛되지 않다는 듯이 영화는 ‘몰락’의 시간을 아주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비춘다.
다시 날아오르는 용기
그는 문득 ‘정시아’라는 이름으로 이력서를 내게 된다. 여성으로 위장하고, 비행 경력이 없는 승무원으로 꾸민 새로운 이력서로 말이다.
처음엔 해프닝처럼 느껴지지만 가발을 쓰고, 메이크업을 배우고, 말투와 제스처까지 바꾸며 그는 새로운 삶의 장에 발을 들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 장면들을 결코 가볍게 그려 내고 있지는 않는다. 정우의 웃음기 뒤에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어”라는 절박함이 보이고, 조정석은 그 미묘한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해 낸다.
면접장에 선 정우. ‘여성 지원자’ 틈에서 그는 더 이상 조종사가 아닌 오로지 ‘취업 준비생’ 일뿐이다.
그 자리는 불편하고 낯설지만 그 불편함을 뚫고 나오는 건 정우의 간절함이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점점 깊어진다. 처음엔 들키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진짜 ‘정시아’라는 인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게 된다.
그가 분장한 인물 속에서도 자신의 인간적인 진심을 잃지 않고 상대방의 슬픔을 위로하고, 누군가의 꿈을 격려하게 되는 순간들은
거짓이 아닌 진짜 ‘사람 정우’의 온기이다.
그리고 진짜 자아를 만나다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이 난다. 정우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서서히 조여 오는 진실의 그림자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정시아’라는 이름 뒤에 숨을 수 없게 된다.
영화는 이 고백의 순간을 유쾌하게 툭 던지지 않는다. 정우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가족에게조차 감춰왔던 자신의 상처와 열등감,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죄책감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가발을 벗고 가족 앞에 선다. 아이의 눈빛, 아내의 침묵, 그 가운데 “나… 계속 날고 싶었어. 비행기 말고… 나로서, 한정우로서…”라고 정우는 말한다.
그 장면은 웃기지 않다. 오히려 뭉클하다. 우리 모두가 어느 날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변했음을 느낄 때, 용기를 내어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정의 내려야 할 때, 그 장면은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아이 역시 아버지를 바라본다. 과거의 조종사가 아닌, 지금 이 순간 가장 인간적인 ‘아빠’를 마주한다.
파일럿은 그 후, 작은 희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취업에 성공했는지, 비행에 복귀했는지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이제 정우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고, 가면 뒤에 숨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관객은 안다.
파일럿은 누군가의 웃음을 끌어내는 동시에, 현실 앞에서 꺾인 자존심, 변해버린 가족과의 거리, 나 자신이 나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떤 이의 눈물을 건드리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당신은 여전히 비행 중이에요.” “잠시 착륙하지 못하고 떠도는 날이 있어도 괜찮아요.”라고 속삭인다.
조정석은 단지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빌려서 그 감정을 우리에게 전했다. 그의 눈빛, 그의 주름, 그가 입은 가발조차 누군가의 현실처럼 깊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결국 진심에 대한 이야기이고 진짜 나를 잊은 채 역할만 수행하던 삶에서 벗어나 다시 나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파일럿이 조종석에 앉을 때 하늘이 아니라 자신의 방향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알듯, 우리 역시 인생의 조종간을 다시 쥐어야 한다.
비행은 때로 흔들리고, 기류는 예측할 수 없지만, 중요한 건 당신이 지금도 날고 있다는 사실이다.
파일럿은 그 자체로 모든 날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관제탑의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