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1인 세대나 소가족 중심으로 살아가다 보니 대가족으로 살아가는 걸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대가족은 여러 세대가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의 결을 섬세하게 담아낸 영화이다. 세대 간의 시선 차이, 부딪치거나 포용하면서 껴안아 줄 수도 있으면서 불편함과 애정이 공존하는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말보다 기척만으로도 더 큰 위로가 되는 이들의 삶은 낯설지 않아 더욱 따뜻함을 느껴 볼 수 있다.
세대가 함께 사는 집, 말보다 더 큰 숨소리
영화 대가족은 세대를 초월한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가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대단한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하고, 아버지는 신문을 넘기며 여전히 권위 있는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한쪽에서는 손주가 게임에 몰두하고 있고 그 옆에서는 딸이 무표정하게 커피를 마시는데 이 모든 장면들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풍경으로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감정과 관계가 조용히 진동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식탁은 이 집의 중심이다. 삼대가 모여 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하루를 건네는 공간이자, 서로의 감정을 조심스레 살피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숟가락을 소리 내어 내려놓고, 누군가는 말없이 반찬만 건네는 모습들 속에서 갈등은 대화가 아닌 기색으로 드러나게 되고, 애정은 짧은 눈 맞춤으로 표현된다. 이 영화는 그 모든 비언어적인 교감들로 이루어지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가족’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다름을 견디는 마음,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
세대가 다르면 바라보는 세상도 다르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머물러야 할 때는 그 다름이 갈등으로 되기 쉽다. 영화는 그 다름을 숨기지 않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손주의 패션을 이해할 수 없고, 손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느낀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품고 조율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감정은 뒤로 미뤄지게 된다. 딸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지만 여전히 가족이라는 무게 안에 있다.
하지만 영화 대가족에서는 이 모든 상황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지는 않는다. 대신 일상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장면들로 그려내고 있는데 장을 보다가 마주한 고기 가격에 한숨을 쉬는 어머니, TV를 두고 벌어지는 세대 간의 다툼, 방 문을 닫고 나오는 무거운 발소리. 이러한 소소한 갈등들이야말로 우리가 실제로도 겪고 있는 가족의 현실에 가까워서 마음에 와닿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음 날 아침에도 다시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부딪히면서도 계속 머무면서 함께 하는 그것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낸 시간, 결국 사랑으로 남는다
이 영화 대가족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일상을 함께 하듯 일상을 지켜보는 시선 때문이다. 카메라는 멀찍이서 인물들을 비추고, 말없이 그들의 하루를 따라간다. 감정을 움직이는 고조된 분위기의 음악도 없고, 배우들의 격정적인 연기도 없다.
그 대신에 관객들은 마치 그 집의 일원처럼 소파에 앉아 영화 속의 가족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작은 감정의 떨림을 느끼게 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늘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실망하고, 지치고, 외로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가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기도 하고, 다시 마음을 내밀고,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다. 가족은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깊이 와닿는다. 그리고 영화 대가족은 그 모든 과정을 애써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그저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 관객들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영화 대가족이 끝난 후에도 그들의 식탁이 떠오르고, 다투던 목소리 뒤의 미안함이 들리는 듯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 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 이야기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대가족’의 일원이고,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