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는 보는 능력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인간성을 잃어갈 수 있는지를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눈앞이 하얗게 번지는 실명 현상이라는 독특한 재난을 통해, 문명과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져 있던 인간 본연의 민낯을 폭로한다.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세상. 그 안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충격적이지만 분명 현실의 연장선에 있다.
빛을 잃은 도시
영화는 도시 한복판, 운전 중이던 남자의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시작된다. 그의 시야는 깜깜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유를 들이부은 듯 새하얗게 번진다. 이전까지 당연했던 시각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도시는 그 공포를 ‘질병’으로 간주하며 가장 먼저 ‘격리’라는 조치를 택한다.
실명은 눈에서 시작되지만, 실제로 흐려지는 건 인간 사이의 관계다. 이웃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고, 가족은 불신의 대상이 되며, 공공의 안전은 공포의 이름으로 바뀐다.
‘하얀 실명’은 차라리 검은 어둠보다도 무섭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그 공포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눈으로만 관계를 유지해 왔는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정부는 질병의 원인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저, 감염자를 한 공간에 몰아넣고 ‘보이지 않게’ 처리하려 한다. 그렇게 격리소라는 이름의 수용소가 생긴다. 외부와 단절된 그곳에서 인간은 다시 원초적인 생존의 법칙으로 돌아간다.
인간성의 붕괴
격리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의사, 노인, 어린아이, 범죄자, 젊은 부부, 노동자. 처음엔 서로 돕고자 애쓰지만, 시야가 사라진 공간에서 규칙은 의미를 잃고, 질서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욕망이 먼저 고개를 든다.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존엄’이다. 화장실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고, 배급된 음식 한 봉지가 폭력을 부르는 신호탄이 된다.
그리고, 음식 배급을 독점한 한 무리가 등장한다. 그들은 다른 병동의 환자들에게 음식을 받으려면 ‘가진 것’을 내놓으라 요구한다. 그 가진 것이 여성의 몸일 때, 이 영화는 “당신은 이 안에 있다면, 무엇을 포기하고 살아남겠는가?”라고 그 누구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 안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은 여자가 있다.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눈이 멀었다고 거짓말하고 들어온 그녀는 모든 끔찍한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본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자신이 ‘볼 수 있다’는 걸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조용히, 강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때로는 나서기도 한다.
시야가 사라진 세상에서 도덕은 눈보다 빨리 붕괴된다. 권력과 욕망, 폭력과 침묵, 그것들이 얼마나 빨리 인간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참혹할 정도로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희망
어느 날, 갑자기 실명이 멈춘다. 시력을 잃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다시 눈을 뜨기 시작한다. 도시는 여전히 폐허처럼 무너져 있고,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이제 ‘보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의 눈빛은 과거와 다르다. 그들은 더 이상 ‘보는 법’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 눈을 맞추는 일, 말없이 손을 잡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감정의 시작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유일하게 끝까지 시력을 간직했던 여자는 “난 아직도 눈이 멀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다시금 혼잣말처럼 말한다.
그 말은 이 세계가 한 번 본다고 해서 완전히 회복되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데 진짜 회복은, 다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마무리하며 – 우리가 잃었던 시선
『눈먼 자들의 도시』는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영화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실명은 물리적 질병이 아니라 우리 안의 무관심과 외면, 그리고 ‘사회적 침묵’이다.
이 영화는 우리는 정말 누군가를 ‘보며’ 살아왔는가? 말 없는 이웃, 침묵하는 가족, 눈길을 피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디까지 이해하고자 했는가?를 묻는다.
감염보다 무서운 건 ‘책임을 나누지 않으려는 사회’이며, 진짜 실명은 누군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무심함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눈, 한 사람의 고백, 한 사람의 행동이 다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보지 못하고, 어디선가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당신이 누군가의 이야기에 잠시 시선을 멈췄다면—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꿈꾸던 ‘희망’ 일지도 모른다.